세계의 가시성과 존재의 비가시성 사이에서

유진상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명제를 통해 세계의 잠재성과 그것에 대한 언어적 기술의 불가능성을 요약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가 창조한 것은 정지된 세계가 아닌 무한히 증식하고 중첩하는 가능성의 알고리즘을 창조한 것일 것이다. 현재의 세계란 관측이 불가능하다. 모든 시점에서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가 아니라면 세계를 현재라는 단면으로 반듯하게 잘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재란 각각의 시점에 따라 그것의 근처를 구성하는 ‘근방역(近方域, voisinage)’에서만 관측될 수 있으며, 시점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것은 점점 과거의 잔상 혹은 출발점의 미래로 바뀌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재의 측정불가능성에 대해 ‘아직(not-yet)’과 ‘이미(already)’, 즉 도래하는 것과 이미 지나가버린 것 사이의 붙잡을 수 없는 현전(Dasein)을 직면하는 것으로 보았다. 불가능한 현재를 추상하고 그것에 직면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시간에 대면하는 방식이며 달리 말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한정하는 ‘시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해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근방 안에서, 세계 전체를 가로지르는 보편적 현전의 형식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을 통해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자현의 최근 전시인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그가 지난 십여 년 간 일관되게 견지해 온 주제인 세계의 ‘중첩(folding)’에 대한 작가만의 독특한 비전을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는 그의 작품들 전반이 소개되고 있는데, 각각의 작품들 뿐 아니라 전시 전체를 총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주제의식은 작품의 모티브 자체가 작가가 구축하는 세계관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사실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흡사 프랙탈(Fractal) 구조와도 같은 수직적 재귀(mise-en-abyme)의 층위(layer)들에서 나타나는 기하학적 선들의 원근법적 구성은 때로는 컴퓨터그래픽이나 홀로그램 등으로, 또 때로는 심지어 가장 비-정보적 매체인 페인팅을 통해 표현된다. 특이하게도, 이 기하학적 중첩의 층위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컴퓨터의 보드나 반도체 부품에 적용되는 ‘회로(circuit)’를 연상시키는 형태가 떠오른다. 하나의 선에서 수많은 다른 방향의 선들로 분기(ramification)를 거듭하는 이러한 형상들이 떠올리는 것은 바로 ‘가능태(possibilities)’ 혹은 ‘조합틀(combinatory)’로서의 세계라는 관념이다. 게다가 이러한 분기의 가능태들은 하나의 층위가 아닌 헤아릴 수 없는 불특정한 복수의 층위들로 중첩되어 있다. 흡사 고성능의 반도체들이 밀집과 적층(積層)을 통해 연산속도와 해상도를 높여가는 것처럼 중첩의 기호들은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분기와 교차의 기호들을 시공간적으로 분절(articulate)하는 결절(nod)들의 밀도와 상호지시성을 더욱 강조한다. 여기서 결절은 다름 아닌 각각의 개별적인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제목은 동명의 2017년 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지털 프린트로 제작된 이 작품은 빅뱅(Bing Bang)을 연상시키듯 어둠 속에서 빛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파동과 입자들, 여러 겹의 물질들이 미지의 점에서 퍼져나가는 모습은 흡사 거대입자가속기 안에서의 충돌로 인해 생성된 극미립자의 궤적들처럼 보인다. 원초적 시공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관심은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때로는 중첩된 회로의 형태로, 때로는 다중우주적 세계관으로, 때로는 원형적(archetypal) 상징과 함께 다루어진다. 세계의 존재양태와 그 기원에 대한 질문들이 종교적 기술 혹은 과학적 담론의 형태로 소구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변치 않는 핵심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다. 종교와 과학은 신의 창조와 물질의 변성이라는 상반된 전제 위에서 세계를 서술한다. 신앙이 물리적 세계의 구체성을 모두 담지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존재 그 자체의 존재이유와 기원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서자현의 작업은 세계의 이 두 가지 양상을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일관성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비전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두 개의 세계관 모두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필요할 것이다. 작가가 깊은 기독교적 신앙심을 지녔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들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천지창조>, <산상수훈>, <성령의 바람>, <복음의 시작>과 같은 작품들은 명시적으로 기독교의 성서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작품들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전자적 패턴들과 기하학적 입체들, 흡사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듯 한 다차원적 공간의 묘사는 시공간과 우주에 대한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적 비전을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신이 우주와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사물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수렴하는 통일장과 그 알고리즘을 창조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해보기도 한다.

 

2020년 작 <천지창조>는 이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도상을 보여준다. 4개의 검은색 정방형 캔버스에 그려진 이 그림들 각각에는 검은 색 바탕에 쓰인 고대의 문자들처럼 보이는 알 수 없는 기호들과 중앙의 입면체로 보이는 윤곽선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육면체가 그려져 있다. 이 문자들 같은 형태는 2018년 작 <천로역정>에서 볼 수 있는 캘리그래피를 연상시키는데, 그 배경이 된 소설은 17세기 말 영국의 존 버니언이 쓴 것으로 끝없는 전락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순례자의 고행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캘리그래피는 마치 배후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연유로 <천지창조>는 세계의 기원이 ‘말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요한계시록의 첫 구절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세계의 기원은 단지 물질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의지’ 혹은 ‘목소리’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입면체의 윤곽선으로부터 구체적 물성을 지닌 기하학적 사물이 생성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이 그림들은 성경과 현대물리학에 대한 서자현의 해석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같은 해에 그린 <산상수훈>에서도 그와 유사한 흥미로운 구성을 엿볼 수 있다. 역시 4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들 역시 <천지창조>에서와 유사한 기호들이 보이는 파란 색 바탕의 배경 위에 반투명의 육면체와 구형이 다양하게 중첩되면서 또 다른 기하학적 공간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독특한 것은 마치 시공간의 버블처럼 보이는 구(球) 안에 그리스도가 기도를 하고 있는 ‘산상수훈’의 장면이 투영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마치 시공간의 무한한 좌표들 위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말씀’이 투사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전시에서는 이렇듯 무한히 중첩되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고 지시하는 형태에 대한 단초를 2016년에 제작된 아크릴릭 페인팅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라는 전시와 동명인 제목의 이 작품들은 전시장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과 같은 수직과 수평의 선들의 교직으로 그려져 있다. 마스킹 테이프와 물감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기하학적, 원근법적 깊이와 회화적 물질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회화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공간 전체의 미장센(mise-en-scène)으로 확장됨으로써 작품의 형식이 단지 조형적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과 연관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원근법적 그리드(grid)와 회화적 물성은 각각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공간재현과 인간 고유의 물질적, 시각적, 촉각적 세계-인지 형식을 함축한다. 혹은 이러한 이항적 중첩은 인지 가능한 것과 직관의 대상인 것 모두에 대해 그 배후를 가로지르는 공통적 기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서자현의 작업은 종교적인 초월과 과학적인 인지-불가능성의 조건들 모두를 감내하면서 세계에 직면해야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면, 우리들 각자의 ‘삶의 형식’(Lebensform)에 초점을 두고 있다.

 

2014년에 제작된 <생명나무>는 커다랗고 가지가 흘러내리듯 헐벗은 나무를 표현하고 있다. 서자현에게 있어 이 그림은 모든 개개인이 처한 존재론적 위기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고통을 대속(代贖)하는 존재의 모습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이 그림 좌우에는 2020년에 제작된 <두 종류의 관계>라는 제목의, 금속 표면 위에 UV 프린트된 이미지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화분 위의 붕대로 칭칭 감은 식물들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처참하게 희생된 신체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두 작품들이 보여주는 희생과 치유의 관념은 전시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표제이기도 한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작가의 글과 상호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2014년 작 <성령의 바람>이나 2020년의 ‘사랑’ 연작과도 이어진다. 전자가 삼부작 형태로 <생명의 나무>에서 보여준 것 같은 수직의 캔버스와 중심의 구상적 모티브로부터 압도적인 아우라를 확산시키는 형식을 보여주었다면, 후자에서는 ‘양귀비’ 꽃을 모티브로 하여 강렬한 붉은색 바탕의 화면을 다중분할 함으로써 기하학적 구조 속에 담겨있는 미증유의 ‘의지’에 대해 암시한다. 양귀비의 꽃말은 ‘위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양귀비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를 빼앗기고 나서 위안을 삼기위해 바라본 꽃이라고 한다. 이 작품들은 각각 <사각심장의 사랑 / 수고의 사랑 / 위로의 사랑, / 우정의 사랑 / 비움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이 양귀비의 모티브는 같은 2020년의 <모나리자> 연작에서도 중심에 나타나는데, ‘마돈나’라는 별칭을 지닌 다빈치의 그림 속에 묘사된 이 인물과 양귀비, 그리고 다양하게 분할, 중첩되어 있는 붉은 화면의 기하학적 구성은 작가가 꿈꾸는 세계의 이상적 조건에 대한 재현처럼 보인다. 시공간의 무한함 속에 투사되어 편재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이 그것이다.

 

이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상작업 <Creation of Heaven and Earth>이 있다. ‘천지창조’로 해석되는 이 작품은 프리즘 무브먼트, 홍텐, 그리고 영상감독 줄라이 윤과 콜라보로 제작되었다. 영상은 비보이들로 구성된 안무를 통해 신체이면서 동시에 기호들처럼 보이는 군무가 이어지고 그 위로 작가의 주요 작업 모티브들과 주제를 드러내는 텍스트들이 교차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해 언급하는 신약 히브리서 11장 2절에 나오는 말씀(‘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을 바탕으로 ‘나타난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에 대해 다루고 있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즉 ‘나타난 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일지 모르지만 보이는 모든 현상들의 배후에 엄존한다. 세계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보이지 않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고통과 미혹에 대한 위안을 삼고자 한다. 이것이 서자현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예술적 표현과 그것에 이르는 과정은 구도의 여정이자 ‘천로역정’에서 보듯 세계 안에서 온갖 장면들을 통과해 그 너머로 나아가는 순례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