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 놓인 존재의 소리

- 시·지각을 통한 공유와 공명

​홍경한

전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Seeing and Being Seen)을 중심으로

 

1. ‘보는’ 것이 대상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 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 예는 흔하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치우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것만 믿고 본 것에 대해서만 진리라 한다. 하지만 ‘보는’ 것이 단지 망막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보는’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정신적‧물리적 외부세계에 반응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의식’한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을 느끼는 것(체감)과 앎(인식)을 내포한다. 따라서 시각을 통한 의식의 경험은 무언가를 깨닫거나 사고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물리적인 영역에서의 비물리적 현상인 지적과정과도 연결된다.

‘보여진다’는 것은 드러남이다. 무엇이 생겨났음을 뜻하는 이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도 있다. 보여줘도 모를 수 있으며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은 주체의 수용태도와 관련이 있다. 받아들임에 따라 표면적인 것과 원형적인 것의 차이, 눈과 정신의 거리만큼의 격차가 발생한다.1)

지난해 11월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서자현 작가의 전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Seeing and Being Seen, 2020.11.29.~12.9)은 그러한 본다는 행위와 의식의 차이를 명징하게 그린 사례이다. 새로운 미적 도전을 선보이는 자리이면서 종교와 인간 삶, 예술과 매체, 개인과 공동체, 주체와 타자, 진실과 왜곡, 경험과 의식, 표상과 내용, 부정과 믿음, 원본과 복제, 공간과 시간 등을 모두 아우르는 입체적인 무대였다.

문화예술기업 (주)세오컬처에서 주최·주관한 해당 전시에 작가는 디지털 및 금속 평면 프린트, 회화, 3D, 부조, 미디어,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작품 150여점을 내걸었다.2)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지점을 시각화하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동시대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했지만, 작품 수만으로도 어지간한 그룹전 규모 이상이다.

다소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심어주기까지 한 이 전시의 기본적인 얼개는 신앙이다. 신약 성경 중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산상수훈>(2020) 시리즈를 비롯해 <비움의 사랑>(2020), <두 종류의 관계>(2020) 등의 신작이 출품됐고, <복음의 시작>(2019), <선을 행하라>(2019), <온전한 제자도의 길>(2019). <성령의 바람>(2014), <천로 역정>(2018) 연작 등도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모두 종교적 화두 아래 공간, 시간, 관객까지도 끌어안는 공통점을 지녔다.

전시는 시각이미지의 향연으로만 해석하기엔 꽤나 방대했고 섬세했다.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전시의 근간인 작가의 관점이다. 서자현은 수없는 이미지(image)를 전시장에 들여 놓고 시각화(visualization)했으나, 기저엔 영원의 상(相) 하에서의 세계를 담았다. 이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논리·철학 논고(원제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에서 주장한 것처럼 당대를 ‘전체로서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 본다는 것과 결이 같다.(촘촘하게 다져진 전시기획임을 증거 하듯 ‘전체로서 한계 지어진 전체’가 지닌 의미는 아래 설명할 ‘큐브’와도 연결된다.)

난이도가 있는 개념임에도 작가는 신(神)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썩 세련되게 풀어냈다. 그리고 공간은 그 영원성의 틀이 실제함을 증명했다. 공간은 작품 및 주제와 분리되지 않았으며 독립적이면서 하나로 집중된 채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라는 대주제를 뒷받침했다.

아날로그 원본과 가공된 디지털 이미지, 그리고 사본에 행위를 덧대어 새로운 원본을 발굴하는 창의적 기법 아래 조직된 작품들3)은 하나이면서 4개의 공간이기도 한 전시장을 혼돈과 질서로 채웠다. 이 또한 ‘전체로서 한계 지어진 전체’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사적으론 2016년 뉴욕 NARS(The New York Art Residency and Studios) 레지던시에서 첫 발표한 동일 주제를 확장해 30년 간 다져온 작가의 정체성과 예술에 관한 철학을 혼란스러운 선과, 그 선으로부터 생성되는 공간의 변주를 통해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전체로서 한계 지어진 전체’의 공간은 다층적 평면구조를 뿌리로 다양한 매체실험을 시도해온 작가의 지난 시간을 종합4)할뿐더러, 예술가의 심미경험과 관람객 간의 관계를 포박하며 삶의 본질과 근원적 가치에 대해 자문케 했다.5) 적어도 기억에 근거한 구상력이나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예술 활동을 넘어섰다. 디지털 혹은 기계화된 동시대 예술의 중심을 관통하며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의 방식까지 훑는 단(壇)이었다.

 

2. 영원성의 차원에서 ‘본다’의 정의는 유동적으로 공간 곳곳에서 빚어졌다. 어느 전시회든 마찬가지이지만 일반적으로 관람자들은 보는 것이 아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임을 해독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공간에 놓인 어떤 ‘발견’에 기댄다.(사실 관람객은 으레 ‘본다’는 타동사 앞에선 목적물을 필요로 하고 작가가 기획한 공간은 내가 아닌 다른 목적물인 대상을 찾기 위해 거닐 수밖에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현대적 산만성과 더불어 거푸집자체가 열려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많은 이들은 있는 그대로 ‘잘 보는 것’에 관해 강조한 데카르트(René Descartes)적 입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무언가 풀이의 열쇠를 찾기 위해 헤맸을 가능성이다. 개연성이 낮을수록 접근하기 쉽지 않고, 눈이 아닌 감성으로 좆아야할 조형이라 해도 무방한 상태에서 관람객들의 느낄 당혹스러움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런 반응은 오히려 작가가 어떻게 공간을 설계했는지 부각시키는 요소이다.(같은 선상에서 첨언하자면, 서자현이 설계한 공간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관한 나와 타인, 목적물과 대상, 인식과 의식의 문제를 적확히 꿰뚫는 것이었다.6)

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것을 명제로 환원해 쉽게 설명했다. 더 이상 헤매지 않도록 구석구석 표석을 세웠다. 바로 믿음(faith), 소망(wish), 사랑(love), 천지창조(the creation)이다. 이 명제들은 일차적으론 자신의 신앙심을 미적인 용사들로 치환하여 믿음을 완성해 가는 자로서의 소망언표이지만, 이차적으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생명의 기원을 가리키는 명제들을 통해 영원불변한 것과 진실함이란 무엇인지 등을 되묻는 기호였다. 나아가 이 기호들은 언어(言語)로 거처(居處)를 옮김으로써 시각적일 수밖에 없는 미술이 메시지로 전환되도록 하는 이음매 역할을 했다.

언어는 표상에 감춰진 레이어(layer)를 들춰내고 내용을 기술하기에 용이하다. 표상으로서의 기호가 시니피앙(signifiant)이라면 시니피에(signifie)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메시지)이다.7)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도 여기에 있다. 일례로 이미지화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절대적인 이에 의한 주권적 선물이다. 소망은 믿음을 소유한 자에 한한 절대자와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한 바람이며, 직접적으론 그분의 도우심에 의탁해야 함을 가리킨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동력이자 인간으로서 완성시켜야할 최고의 덕목이다. 명제에는 없으나 행복도 그 아래 범주에 둔다.

그에게 믿음, 소망, 사랑은 단순한 앎(이해)의 차원을 넘어 무엇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방향을 정해야하는지를 보여준다. 고백적이고 사변적일 수 있으나 공간을 걷다 마주하는 명제의 꼭짓점에 다다르면 어떤 게 우리 삶에 있어 전환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전시와 작품들이 어느 지점을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공간에 펼쳐놓은 서자현의 150여 표상들은 하나하나가 전환을 위한 표식이다.

4개의 명제 중 가장 미스터리한 것은 으레 먼저 등장했어야할 법한 ‘천지창조’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가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탄생’이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인 천지창조는 약 4년 동안 미켈란젤로가 혼자서 그렸다. ‘아담의 탄생’은 본래 처음의 일이지만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역순으로 묘사했다. 작가의 전시구성이 계획적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의 ‘천지창조’엔 보다 다층적인 함의가 녹아 있는데, 무엇보다 존재 혹은 정체성에 관한 자각이다. 왜냐하면 천지창조란 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요, 나의 존재란 타자의 존립 내에서 가능한 탓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엔 발원이 있다. 아담과 신의 손가락이 맞닿을 듯한 장면을 연상하면 쉽다. 그냥 저절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결국 천지창조라는 명제는 무엇으로부터(혹은 신앙으로부터)의 시작을 의미하면서도 어떤 고비를 극복한 삶의 새로운 출발을 뜻한다. 역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끌어안으며 다시 처음을 돌아보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공간 설정만 놓고 보면 천지창조라는 명제가 왜 후순위에 놓였는지 파악되는, 꽤나 지혜로운 구성이다.

 

3. 공간은 선(線)을 머금는다. 선과 선이 이어져 면을 만들고 면은 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사실적이면서 허구적인 양면으로 드러난 채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 관람자들을 유도한다.(현실은 내가 서 있는 장소를 뜻하며 허구는 의식되기 전의 가시적 상황이다.)

그 시발점은 전시장이 아닌 작업실에서부터이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종이테이프를 이용해 촘촘히 선을 만들고 안료를 입힌다. 오랜 기간 동일한 반복을 거쳐 말린 후 마스킹테이프를 거둬낸 다음 다시 안료를 얹는다. 그러기를 쉼 없이 왕복함으로서 선의 밀도는 ‘보이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눈에서 마음의 믿음’으로 전이된다. 작가는 이를 사진으로 담는다. 디지털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창조된 이미지에는 시간이 누적되어 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실제화 한다. 이는 일종의 흐름으로, 흐름을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주체는 실존이다. 실존은 나를 중심에 두지만 타자 없인 실존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시간 위에 똬리 튼 실존은 나와 다른 이들의 존재성을 옹립시키는 명사인 ‘관계’로 이어진다.

관계8)는 서자현이 치밀하게 직조한 선을 통해 수없이 교차(교차의 방식이 십자 형태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되고 불쑥불쑥 재현되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는 익명 모두를 포함한다.(전시장을 찾은 모든 관람객들까지도.) 그렇게 선은 들어섰다 되돌아가는 자와 깨닫는 자, 보는 자와 믿는 자를 통합하거나 나눈다. 그러면서 때론 세상의 모든 연결고리이자 브릿지(bridge)인 개개인의 무언가로 위치한다. 나와 공동체, 사회와 구성원이라는 폭 넓은 카테고리를 포괄하는 이것은 그 자체로 무수한 인간 삶이다.9)

시간은 ‘삶’을 소환한다. 간혹 노스텔지어(nostalgia)와 어떤 기억과 경험, 상상의 환류로 자리하나, 삶을 건설할 유일한 형식인 건 부정하기 어렵다. 서자현이 그동안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종국엔 삶에 관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작가가 겪어야 했던 힘든 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중첩의 ‘큐브(cube)’가 있다. 이는 열려 있는 사각으로, 보편적 설명은 ‘일정한 공간에서 시작된 생이 그 특정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접는 동시대인들의 실존적 삶을 묘사하고 있다’이다. 사각을 감싸는 틀에 대해선 존재를 가둠과 함께 호위의 장막이 된다고 부언한다. 하지만 이 큐브는 해석된 공간의 연장이다. 해석된 공간은 저마다 다른 인간 삶에 드리운 양의 영역(positive area)과 음의 영역(negative area)이다. 보다 내밀하겐 작가에게 적용된 ‘자기고백의 성소’이다.

‘큐브’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고백의 성소이지만, 우린 그곳에서 주체가 주체일 수 있는 욕망, 또 다른 주체인 동시에 자아가 다른 주체와의 관계를 매개하는 상징적 대타자의 시선에서 가해지는 또 다른 욕망의 변주를 확인한다. 이는 ‘인간은 언제나 대타자를 끊임없이 요구할 뿐 욕망의 독(궤, 匵)을 수평화 할 수 있는 재량은 우리에게 없다’는 자크 라캉(Jaques Lacan)의 주장과 맞물린다. 예술이라는 언어의 육화된 의미를 배척하는 지점에선 되레 스스로의 욕망 또한 거세진다는 것의 내재화이다.

그의 선은 조형적 관점에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선은 공간을 구획하는 색채와 함께 추상적 조형요소이자 감정표현의 기호로 대체되곤 하는데, 조형요소로써의 선과 조형원리로서의 선이 동시에 들어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선은 분명 곧은 직선이지만 여운에서 만큼은 루이지 꼴라니(Luigi Colani)의 대표적 조형성 중 하나인 살아 움직이는 듯 수용된다. 방향과 속도를 외형화 한 직선에 심리적 곡선이 내면화 되는 형국이다.

보이는 선과 보이지 않는 선은 쉼 없이 교류하고 사회적 층위를 만들어가는 동시대인들을 우회하지 않는다. 어느 것은 직접적이고 또 어느 것은 다분히 심적이다.(쉽게 말해 전시에서의 선은 공간을 매트릭스(matrix)적으로 꾸미면서도 삶이라는 소실점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혹자는 이 선을 하나의 길(way)로 받아들인다. 운명이나 숙명처럼 삶과 근친한 인상도 받는다. 어는 것이든 모두 틀리지 않다. 예술이 그렇고 서자현의 작업이 그러했듯 독재적 요소는 없다. 다만 그의 선은 표상 불가능한 ‘감정’을 자극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감정이란 서자현이 제시한 공간에 들어선 이마다 다를 수 있다. 검정, 회색, 빨강 등으로 명징하게 성격을 부여한 공간에서 불현 듯 스치는 감상일 수도 있고 규칙, 통일, 비례, 리듬 등의 조형원리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선의 끝자락엔 대체로 형용 어려운 것들이 열린다. 나중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소주제와 연결됨을 알아차리지만 과정에선 각자의 해석으로 귀결된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이 소주제를 중심으로 돌고 도는 것은 다시 복잡하고 난해하며 복층의 공간10)인 사회 속 삶의 모든 대리이다.

이처럼 서자현의 공간과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지닌다. 신에 대한 봉헌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음에도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중첩지대를 제시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을 설정하고 규명한다. 명제를 읽거나 혹은 인터뷰, 몇몇 오브제와 형상 이미지를 접하면 상당히 로고스(logos)적이긴 하나, 현실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열람할 수 있다.

 

4. 그의 작품들을 보다 원거리에서 살피면 생태적 관계 등의 완벽한 고리에서 복제된 인격과 분열된 자아가 충돌하거나 모순적으로 조화되는 상태를 고지한다. 작품의 논리에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원제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6)에 적시된, 아우라(aura)에 의거한 예술의 자율성의 붕괴와 지각양식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본연의 관점은 자아의 동일성이 해체된 공간, 거세된 동일성을 개방하는 현재의 연속이다.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으로서의 이성적인 본성(本性)을 가진 개별적 존재자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형이상학적 상황을 심리적 리얼리티로 전달한 전시는 종착지에 도달하기 전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바로 ‘진실(truth)’이다. 오리지널과 복제 혹은 복사본이 얽히고설켜 진짜 원본은 무수한 사본에 원본의 위치를 내주는 현실을 고찰하고 변형된 원본과 복제 간 차이, 구분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동시대(미디어, 군상 등)를 살핀다. 그리고 그 배경에 진실 혹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병풍처럼 펼쳐놓는다. “눈에 보인다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를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fact)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일이 사실이라면 진실에는 사실과는 결이 다른 ‘마음’이 있다. 때문에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지정하는 건 사실에 앞선 마음이다. 마음은 믿음과도 밀접하다.

서자현은 그 마음에 파장을 시각예술을 통해 되레 가시적인 것의 초월을 말하고자 했다. 전시라는 행위로 사실의 의미를 부단히 해석하고 분석해 마음에 둥지 튼 진실, 진리, 믿음을 좆았다. 다만 이와 같은 진실과 믿음에 누구나 민감한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실은 본래 형체가 없다. 거짓 없는 사실은 믿음에서 분리되기 어렵고 믿음이란 진실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믿음이 방기되면 진실의 형체는 와해된다. 믿음은 보편된 좌표를 남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느 경우 진실은 불편하며 혼란이다. 서자현은 이와 같이 다양한 측면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전시에 투사했다. 그건 매우 전면적이었고 눈으로만 판단하기엔 섣부른 것이었다.

그럼 예술은 진실과 믿음을 소환할 수 있는가. 있다. 예술에도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해 파악하는 형이상학 혹은 진실이 존재한다. 예술은 인간과 격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부이며, 그 일부를 위해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만 만족시키면 예술의 진실이 시공간을 초월해 믿음으로 존립하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쉽게 얻지 못한다. 오로지 ‘사유’로부터 가능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의하면 사유란 모든 존재자들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환영하여 자신 내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그 소리들이 마음 안에 모여 공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유는 인간이 인간으로 설 수 있도록 하는 본질이고, ‘존재의 소리’를 청취하여 받아 적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같은 시선에서 이번 전시도 존재의 소리를 청취하여 받아 적는 과정과 가깝다. 개별적인 소리들이 어떻게 산출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쉼 없이 말을 내뱉는 우리에게 작가는 정신적 사유를 전제한 채 자신만의 조형적 방법11)으로 소리의 공유를 통한 공명을 드러내려 했다. 이후 얻을 수 있는 건 예술적으론 당대 환경에 가장 적합한 모더니티(Modernity)를 구축하는 방식에 관한 고민이다. 미적으론 보는 것이란 의식에 의해 변화함이며, 현실세계에선 변화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할 진실과 믿음이다.

이러한 의도를 체감한 관람자들은 작가 서자현이 만든 상황에 의해 의식을 달리한다. 달라진 의식은 본다는 것의 가치를 새롭게 한다. 비로소 본다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을 수용한다. 이는 미의식과 미적 태도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언어에 대한 태도, 변화한 언어구조에 대한 지각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태도는 성찰을 동반한 새로운 실천과 행동을 낳는다. 어쩌면 작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1)탈근대미학은 재현의 미학이 아니라 창조의 미학이다. 재현이라 해도 과거 같이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하진 않는다.

2)이번 전시에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다중예술에 자극을 받아 스트리트댄스 크루 프리즘 무브먼트(FRZM MOVEMENT)와 협업한 미디어도 선보였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메시지 전달의 용이성을 위한 시도였다. 특히 이 작품에는 한국 최초 비보이 세계 1위인 홍텐(HONG10)이 특별출연하였다. 작가는 이 미디어 영상을 초대형 LED 패널을 통해 처음 공개했다.

3)기법에 관한 내용은 여타 글에서 자주 등장하기에 본 비평에선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미학적인 측면에 치중했다. 그래도 작가의 말을 인용해 부언하면 작가는 “아날로그 작품이 사진기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혀 다른 모습의 이미지로 변신함으로써 그동안 고민해온 미디어 속 인간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려 했다.”고 설명한다.

4)서자현 작가가 지난 2007년 발표한 논문『현대미술의 다층적 평면구조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작가 작업의 연대기를 확인할 수 있는 매개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섬유미술에서부터 사진,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미적실험을 엿볼 수 있다.

5)이는 과거 겪어야 했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 아픔이 녹아 있다. 인터뷰에 의하면 작가는 오래 전 꿈에서 만난 하나님을 작품으로 만든 ‘하말그하말디(하나님 말씀을 그리다, 디자인하다)’를 주제로 성경말씀의 단어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디지털 이미지로 재현했다. 이번 전시에도 그 흔적을 열람케 하는 작업이 선보였다.

6)서자현의 공간은 한발 한발 내딛을수록 그 내부로 침잠하게 만들고,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스스로 찾아가 대상과 조우하여 의식화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7)언어학자인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기호를 분리될 수 있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기호 속 발음을 시니피앙으로, 그 발음에 의해서 발생하는 관념적 내용을 시니피에로 간주했다.

8)실제로 작가의 작업 중엔 인간관계를 표상화 한 것들도 있다.

9)여기까지 이르면 관람자들의 다수는 어지럽게 느껴지던 공간에서 이탈해 색다름을 깨닫는다. 행복과 고난과 사랑과 절망이 그 고리 내에 배어듦을 읽으며 자아와 정체성, 원본과 복제, 환영과 사실 등을 경험한다. 이때 비로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역시 파악한다. 그건 매우 심적이다.

10)여기서의 공간은 현실공간과 동일한 것처럼 지각되나, 그 공간은 결코 현실공간이 아니다. 주어진 공간은 3차원의 공간이지만 선의 특성에 따라 일정하게 왜곡된 2차원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왜곡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과 접점을 맺는 공간, 그것이 복층의 공간이다. 진실과 관련해 우리 사회는 실상 복층의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이번 전시에 선보인 그의 작업은 시간성으로 서술할 때 기술적 차원이 아니라 예술에 관한 감각이 변화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감각의 변화는 미적 감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 할 수도 있다.

홍경한은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 칼럼니스트이다. 미술전문지 월간 <미술세계>와 <퍼블릭아트>, <경향아티클> 편집장을 거쳐 2018 강원국제비엔날레 예술총감독, 대림미술관 사외이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경향신문>과 <메트로신문>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 DMZ문화예술삼매경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2017), 『민주주의와 리더십』(2016) 등이 있다.